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해방군/역사 (문단 편집) == 계급제 도입 == 1955년도에 최초로 계급제도를 도입하였다. 즉 1927년 남창봉기 때부터 국공내전, 중일전쟁, 6.25 전쟁을 치루는 동안은 계급없이 직책만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는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초창기 적위대는' 모든 인민의 평등한 군대'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계급이 없었으며, 병사소비에트의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지휘관들이 전투중에만 제한적인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모든 평시생활은 병사소비에트의 결정에 따랐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서 적군은 [[적백내전]] 초창기에 연전연패했다. 이에 1918년 [[트로츠키]]는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도입하였으며, 1935년 계급제가 전면도입된다. 중국군도 소련의 이러한 실패를 똑같이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군이 500만에 달하는 거대규모로 성장하자 계급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한국전쟁때부터 의논해서 1955년도에 10대 원수, 10대 대장 임명을 시작으로 계급제도를 전면 도입하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마오쩌둥은 끝까지 사상적 이유로 계급제를 싫어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대원수 계급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10대 원수는 [[주더]], [[펑더화이]], [[린뱌오]], [[류보청]], [[허룽(군인)|허룽]], [[천이]], [[뤄룽환]],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이다. 하지만 계급제는 1965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이 때문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판문점의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로 새로 부임한 정감여(丁甘如)는 그저 동지라는 직함만을 가지고 새로 부임하였으나, 유엔사측 수석대표 윌리엄 야보로 육군소장은 정전협정 20항에 군정위 인원 10명 중 5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공동으로 임명하며, 3명이 장성, 2명이 소장, 준장, 대령이나 그와 동급의 사람으로 임명한다고 되어있는데, 정감여는 동지라는 직함만 가지고 있으니 대표 자격이 없다고 시비를 걸었다. 게다가 중국인민지원군이 1958년에 철수한 상태로 더 이상 사령원도 없기 때문에 그의 신임장에 사령원의 이름이 없는 것도 문제삼았다. 이에 북측 수석대표 [[박중국]] 소장은 내정간섭이라고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대응했으나, 정작 정감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북한 측을 답답하게 했다. 정감여는 1967년에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북중관계가 악화되면서 1971년 하거야(何渠若) 소장이 부임하기 전까지 중국 대표는 공석으로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